몽양 기념관 전경. 계단을 올라가면 생가가 있으며 남한강쪽을 내려다 보고 있는 생가가 있다. 사진=이종철

일제식민지 시절 민족지도자였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하 몽양)의 생가와 기념관을 찾았다. 양서면 몽양길 66번지, 신원역 바로 뒤에 자리잡고 있다.

한 시대를 풍운아처럼 살다간 몽양을 짧은 글로 표현하기는 부족하다. 짧게나마 양평지역에 민족지도자의 숨결이 어려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양평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방문해 정확히 배우고 타지역 사람들에게 ‘자랑’해도 되지 않을까.

몽양은 1886년 5월 25일 양평군 신월리 묘골에서 태어났다. 1900년 배재학당(현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평양신학교와 중국 난징 진림대학 영문과를 거쳤다.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했으며, 1919년 1월 김규식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는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해방 이후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 남북이 분단되는 상황을 막으려 했다. 정적들에 의해 암살 당할 기회를 11번 면했으나, 결국 12번째 권총피격으로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타리에서 6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시 몽양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박헌영 등을 접촉해 어떻게든 통일된 조국을 후세에 남겨주기 위해 그들을 설득했다. 몽양이 추구하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산주의, 중도주의자들이 공존하는 통일된 정부였다.

해방이 됐지만 일제청산은 지지부진하고, 좌우로 나뉜 남한에서 몽양은 좌우 어느쪽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돼 항상 암살의 위협 속에 살아야 했다. 이 시기 가족들에게도 테러위협을 감지한 몽양은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북으로 보내는데, 이때가 1947년 3월이었다. 이들은 그해 7월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난다. 세 자녀를 북으로 보낸 것은 당시 가족들도 테러 위협이 심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까지 평가는 엇갈린다.

몽양기념관 강지현 학예연구팀장은 11일 몽양을 찾은 기자에게 몽양이 자녀들을 북으로 보낸 이유에 대해 “그의 바램은 남북이 사상적으로 다양하더라도 함께 살기(통일)를 원했다”며, “그것이 이뤄진다면 누구나 남과북을 오가며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자녀들을 북으로 보낸 것이라 생각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음은 몽양기념관 강지현 학예연구팀장과 일문일답.

Q. 몽양이 추구하는 정신은 무엇인가요?

A. ‘정관매진(正觀邁進)’입니다. ‘바르게 보고 힘써 나아가라’는 뜻이죠. 민족독립, 평화통일의 길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던 몽양을 떠오르게 하는 말입니다. 1944년 일본이 패망하기 전 이미 해방을 예견했던 몽양은 ‘조선건국동맹’이란 독립운동 비밀결사조직을 구성해 좌우로 나눠질 것을 예상하고 통일을 준비한 분으로, 이러한 정신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Q. 일부 인사들이 지적하는 몽양의 좌편향적인 의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그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합니다. 무엇보다 세 자녀를 북으로 보낸 것이 결정적이라 봅니다. 하지만, 몽양 자신의 안위가 위태롭고 자녀들도 위험하다고 생각돼 벗어나게 하고픈 절박한 심정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만약 몽양 자신이 공산주의를 동경했다면, 그 자신도 북으로 갔을 수도 있었겠죠. 1947년, 당시 어느 때보다 국내 상황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좌우 대립이 심각했던 시기로 국민들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바람은 남북이 사상적으로 다양하더라도 함께 살기(통일)를 원했고, 그것이 이뤄진다면 누구나 남과북을 오가며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자녀들을 북으로 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만약 몽양이 원하는대로 남북이 통일됐다면, 지금 우리나라가 공산당이 집권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A. 물론 가능했을 겁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들에서 좌익세력이 집권한 적이 있고, 남미지역도, 까까운 일본에도 공산당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국가, 미국에도 공산당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남북이 몽양이 생각하는 국가로 태어났다면 북한의 공산당은 김일성이 추구하는 왕조국가가 되지 못하고 지금의 일본이나 미국처럼 군소정당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이론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 자유경제체제를 도입하지 않으면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중국이나 베트남이 발전하고 잘 사는 것은 자유경제체제를 받아들였기 때문 아닙니까. 지금의 북한은 단순한 공산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자신이 영구집권하고 정권을 아들, 손자에게 물려주는 식의 공산주의, 즉 북한식 왕조국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계 어느나라도 정권을 아들, 손자에게 물려주는 공산국가나 사회주의 국가는 없거나, 있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Q. 지금 젊은이들이 몽양을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불행하게도 역사교과서에 깊은 내용이 담겨 있지 않은 게 사실이고, 실제로 잘 알지 못한다고 봅니다. 저희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고, 교육관 프로그램을 통해 몽양의 정신을 배우게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많은 학교에서 참여하기를 기대합니다. 몽양은 독립운동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체육계, 출판, 문화계, 외교계 등 여러 방면에 두각을 나타낸 분으로, 우리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입니다. 저희는 몽양 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Q. 양평 주민들도 인근에 몽양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더군요.

A. 네, 기본적으로 양평 주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몽양기념관을 방문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이처럼 훌륭한 민족지도자가 태어난 곳에 산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을 키우는 부모님은 꼭 동반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자녀들은 우리의 미래고 나라의 자산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갈 자녀들에게 올바른 민족정신을 갖게 하는 것도 부모님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단어, 수학 문제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는 게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느낄 수 있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Q. 몽양과 몽양기념관 모두 대중적 인지도가 낮습니다. 몽양기념관 운영 측면에서 아쉬운 점은 없나요?

A. 네, 인근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 생가와 비교하면 시설도 미비하고 불편한 점이 많아요. 진입로도 좁은 편이고, 주차장도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정약용 선생 못지않게 존경받아 마땅한 민족지도자 몽양이지만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최소한 정약용 생가와 견줄 정도의 시설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양평군이 이곳을 성지화해 관람객들이 더 많이 찾도록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러 관람객을 모으기 위한 인위적인 시설보다, 기존 역사적 장소를 개발해 더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문의 : 몽양기념관(031-775-6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