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울미술관 입구 전광판이 전시 내용을 알리고 있다. 사진=조아란
옛 벨기에 영사관이었음을 알리는 표지. 사진=조아란
삐걱거리는 계단과 마룻바닥을 그대로 쓰는 미술관 내부와 그림 전시. 사진=조아란
설치 미술과 그 작품 앞에서 행위 예술을 하는 모델. 사진=조아란
모든 작품들이 알기 쉽게 설명돼 있다. 사진=조아란

서울 동작구 남현동에 위치한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이 권진규 작품전 ‘권진규의 영원한 집’ 상설 전시회를 연다.

권진규 작가는 1922년 함흥 부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 입학,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이루는 중요한 토대가 이때 형성됐다.

작가는 일본으로 유학가 부르델의 제자 시미즈 다카시에게 부르델의 정신과 조각이론에 근거한 교육을 받으면서 부르델과 그의 제자 자코메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부르델은 로뎅의 조수였지만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고자 했고, 이를 토대로 독창적인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현했다.

권진규 작가는 1951년 일본 유학 중 무사시노미술학교 후배 오기노 도모와 사귀다 혼인신고를 했지만 한일수교 전이라 혼자 귀국한 후 그것으로 인연이 끊어졌다. 그후 두 번의 짧은 결혼 생활을 했지만 후일 여동생 권경숙에게 “도모와 함께 살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라고 속내를 보이기도 했다.

권진규에게 도모는 훌륭한 모델이었고, 예술적 교감과 생계를 나눴던 동료이자 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테라코타를 시작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여러 모로 그의 작품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권진규 작가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와 어릴 때부터 절에 자주 다니면서 불교적 세계관을 갖게 됐다. 1971년 양산 통도사 수도암에 기거하면서 국보 제83호 불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참고해서 불상 제작에 전념했다.

그러나 큰 반응을 얻지 못하자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마를 부수고 자살을 암시했다. 그는 1973년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현대미술실을 만들면서 ‘가사를 걸친 자소상’과 ‘마두’ 작품을 소장하기로 하자 기뻐했던 것도 잠시, 개막식에 참석한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표박미인이 미의 피안길이 아니기를, 운명이 비극의 서설이 아니기를…”이라는 그의 시구는 현실이 됐다. 천재 작가의 51년 짧은 생은 그렇게 마감됐다.

한편,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옛 벨기에 영사관이었던 곳을 우리은행이 매입, 서울시에 기증한 후 기증자의 뜻에 따라 상설 전시를 하게 됐다. 1950~70년대 조각, 소조, 부조, 드로잉, 유화 등의 작품을 1층 5개실에 전시하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작품을 교체해 상설관으로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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