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사에 양평이 있었다.
양평 상원사는 1907년 후기의병 당시 양평의병 근거지였던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양평의병은 권득수, 조인환 의병장 지휘 아래 용문산 상원사를 비롯하여 용문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1907년 8월 24일 일본군 보병 제 52연대 제9중대가 용문사를 습격해 오자 상원사로 후퇴하여 항쟁하였다. 이때 상원사는 일본군에 의해 동종만 남고 전소되었다. 이렇듯 양평은 기리 빛날 일제무쟁투쟁사에 기록될만한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특히 화서 이항로(1792~!868)선생은 조선말 위정척사운동으로 항일의병활동의 구심점이었던 화서학파의 태두다..
선생의 제자들인 최익현, 양현수, 유중교, 김평묵 등 1000여명이 일제에 무장투쟁으로 항거했다. 금계 이근원(1840~1918) 선생은 조선말기 양평이 낳은 유림의 태두 화서 이항로 선생의 후진문하생으로 선생 서거 후에 동문이었던 김평묵과 유중교 두 선생에게서 다시 수학해 화서학파의 구심점이 됐다.
지평면 월산리에서 태어난 금계 선생은 화서선생의 뒤를 이어 월산리에 금리정사를 열고 일직당을 세워 위정척사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유학자다.